“우리는 원본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모두 복사본으로 죽게 되는가?”“우리는 원본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모두 복사본으로 죽게 되는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의 이 숙제 같은 질문을 깊이 고민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보다 쓸모 있는 내가 더 환영받는 사회에서, 원본으로 사는 법을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좀처럼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지를 탐험할 에너지도, 지갑의 여유도 부족해 인기순으로 정렬된 목록에서 옷을 고르는 시대 아닌가. 실패를 피하려 복사본이 되기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이런 질문은 공허한 외침으로 흩어지기 쉽다. 어쩌면 진지하게 곱씹는 이들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뜬구름 잡는 고민을 할 여유가 있다니, 살만한가 보네.” 같은 반응이 더 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 앞에서 정말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있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이 세상에 아름답게 참여할 자기만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이다. 내가 믿는 나와 현실이 주장하는 내가 충돌할 때 기꺼이 자신의 편에서 기다려주며, 다른 잡음보다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려는 사람들. 그들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면 나의 내일을 가꿔나갈 생기가 채워짐을 실감하면서도, 동시에 그 값진 에너지에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실체 있는 불안을 견디는 이들에게 실체 없는 위로를 건네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런 신중한 마음이 들 때, 흩어질 몇 마디 말 대신 건네는 영화가 있다. 어려운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을 그리면서도, 흔한 성장 서사의 공식대로 흘러가지 않는 작품이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운명적 기회를 통해 주인공이 꿈을 이루거나, 과정이 가치 있었으니 괜찮다는 식의 합리화로 마무리하며 현실의 관객으로부터 한 발짝 도망치는 대신, 영화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네가 원하는 그거,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맞아?네가 원하는 그거,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맞아?
상대의 판단력이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딴지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자기다운 삶을 발견하고 원본으로 남을 수 있냐는 추상적 물음의 실질적인 답으로 이끄는 길잡이에 가깝다. 욕망의 발원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인지, 혹은 외부의 개입으로 형성된 것인지 구분하는 과정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고 에너지를 비축하며 마침내 자기다운 삶이라는 목적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 그 응원이 담긴 영화가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