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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s

우리는 원본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모두 복사본으로 죽게 되는가?

낭만과 현실 사이, 나다운 삶을 찾아서 <프란시스 하> 
김수이
2025.3.15
©IFC Films | Edited by 2ulip
“우리는 원본으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모두 복사본으로 죽게 되는가?”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의 이 숙제 같은 질문을 깊이 고민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보다 쓸모 있는 내가 더 환영받는 사회에서, 원본으로 사는 법을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좀처럼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지를 탐험할 에너지도, 지갑의 여유도 부족해 인기순으로 정렬된 목록에서 옷을 고르는 시대 아닌가. 실패를 피하려 복사본이 되기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이런 질문은 공허한 외침으로 흩어지기 쉽다. 어쩌면 진지하게 곱씹는 이들보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뜬구름 잡는 고민을 할 여유가 있다니, 살만한가 보네.” 같은 반응이 더 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 앞에서 정말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있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이 세상에 아름답게 참여할 자기만의 방식을 고민하는 이들이다. 내가 믿는 나와 현실이 주장하는 내가 충돌할 때 기꺼이 자신의 편에서 기다려주며, 다른 잡음보다 마음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려는 사람들. 그들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하면 나의 내일을 가꿔나갈 생기가 채워짐을 실감하면서도, 동시에 그 값진 에너지에 어떻게 보답할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실체 있는 불안을 견디는 이들에게 실체 없는 위로를 건네고 싶지는 않아서다.
그런 신중한 마음이 들 때, 흩어질 몇 마디 말 대신 건네는 영화가 있다. 어려운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청춘을 그리면서도, 흔한 성장 서사의 공식대로 흘러가지 않는 작품이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오기 힘든 운명적 기회를 통해 주인공이 꿈을 이루거나, 과정이 가치 있었으니 괜찮다는 식의 합리화로 마무리하며 현실의 관객으로부터 한 발짝 도망치는 대신, 영화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네가 원하는 그거,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맞아?
상대의 판단력이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딴지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자기다운 삶을 발견하고 원본으로 남을 수 있냐는 추상적 물음의 실질적인 답으로 이끄는 길잡이에 가깝다. 욕망의 발원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인지, 혹은 외부의 개입으로 형성된 것인지 구분하는 과정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짐을 덜어내고 에너지를 비축하며 마침내 자기다운 삶이라는 목적지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 그 응원이 담긴 영화가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다.
©IFC Films
‘프란시스 하’는 프로 무용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뉴욕에 정착한 스물일곱 프란시스의 여정을 따라간다. 견습 단원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 재정적으로 점점 궁지에 몰리는 그녀는 월세에 쫓겨 무려 일곱 번이나 주소를 옮긴다. 영화는 그 이동 경로를 따라 전개되며, 정착하지 못하는 프란시스를 비춘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이내 눈치챈다. 그녀가 찾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의 집뿐만이 아니라는 걸.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프란시스가 정말로 찾아야 하는 대상은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라는 문장의 두 번째 집, 즉 정서적 안식을 안겨줄 자기다운 삶의 방식이다.
긴 여정을 거쳐 프란시스는 마침내 자신만의 보금자리와 삶의 방식을 모두 쟁취하게 되는데, 그 비결은 바로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데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던 두 가지 욕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맞는지를 되묻고, 이를 재정립함으로써 자기다운 삶에 다다를 수 있었다.
©IFC Films
우리는 우리답게 영원해졌다
그녀의 첫 번째 욕망은 정서적 안식처인 소피를 향한 집착이었다. 한 침대에 누워 보스턴 메리지를 약속하고, 이내 어린아이처럼 베개 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절친 이상의 무언가다. 만약 누군가에게 자아의 일부를 내어주고, 그와 함께할 때만 온전한 내가 된다는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프란시스가 소피에게 보이는 집착이 결코 과장된 감정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란시스는 영화에서 여러 번 달리지만, 영화 문법상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좌에서 우의 방향성이 아니라 언제나 우에서 좌로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화의 시각적 질서를 거스르는 이 움직임은, 프란시스가 세상의 흐름과 맞지 않는 인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나란히, 기꺼이 거꾸로 뛰어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소피다. 그런 소피가 이사 및 약혼을 선언하던 순간, 프란시스는 단순히 물리적인 주거지와 동거인을 잃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홈리스가 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관계성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여느 관계가 그렇듯 붙잡을수록 더욱 멀어질 뿐이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소피가 약혼자를 따라 일본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이다. 프란시스는 비로소 자신이 집착하던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이별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프란시스가 원했던 우정은 사실 다른 모습이었다. 이번 생에 그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이유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들, 둘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세계가 존재하는 관계. 하지만 반드시 함께 살아야 하고, 양쪽 모두 결혼하지 않으며 가장 가까운 사이임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집착은 그녀가 원하는 우정의 본질이 아니었다. 프란시스는 소피를 향한 마음 안에 변화하는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도피적 욕망이 섞여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이 명확해지는 순간은, 아침 일찍 몰래 떠나는 소피를 붙잡으려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프란시스는 끝내 소피가 탄 택시를 놓치자, 영화는 처음으로 일인칭 시점 숏을 배치한다. 이전까지 영화는 프란시스를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 숏이나, 전지적 시점에서 관조하는 마스터 숏으로만 담아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시선을 가진 채, 타인을 붙잡으려 뛰쳐나오느라 떨고 있는 초라한 맨발을 내려다본다. 타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으며, 그 집착 또한 온전히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러한 직시와 재정립을 거친 뒤 두 사람이 맞게 되는 결말, 엔딩의 가슴 벅찬 눈 맞춤은 프란시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 쟁취했음을 확신하게 한다.
그 집착 또한온전히 자신의 욕망에서비롯되지 않았음을
©IFC Films
만들어진 꿈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두 번째 욕망은 성공한 무용수가 되겠다는 오랜 꿈이었다. 객원 무용수로 일하며 정식 단원 자리를 기다려왔지만, 정작 무용수가 아닌 사무직 일자리를 제안받은 프란시스. 그녀는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다른 일자리가 있다는 거짓말로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갈 곳을 잃은 그녀는 숙식이 제공된다는 이유로 교외에 위치한 모교의 행사장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기숙사 복도에 홀로 앉아 울고 있는 소녀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모교 복도에서 데칼코마니 구도로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프란시스가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는 듯한 설정으로도 보인다. 만약 우리가 막 꿈꾸기 시작한 어린 자신을 앞에 둔다면, 과연 현실적으로 이루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에게 시작조차 하지 말라며 포기를 권할 수 있을까? 무슨 일이냐는 질문도, 별다른 위로도 없이 그저 함께 있어주기만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은 마치 그 질문의 답을 보여주는 듯하다.
©IFC Films
자신을 둘러싸고 압박하던 사회와 연결이 느슨해진 채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프란시스는 그간 좇아온 무용수라는 꿈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그녀가 무용을 시작할 때 꿈꿨던 것은 무용수가 되지 못하면 무너지는 삶이 아니라, 무용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사회가 슬며시 옮겨둔 방점의 진짜 위치는 본래 삶에 찍혀 있었다. 무언가가 되어야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는 외부의 시선 속에서 어느 순간 그 이상이 변질된 것이다. 행복이 반드시 유명한 무용수가 되는 것에 달려 있지 않음을 깨닫자, 프란시스는 좇아오던 꿈을 기꺼이 내려놓고 안무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택한다. 점심시간을 쪼개 분수대 앞에서 춤을 추는, 대역으로 무대에 서던 장면보다 한층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프란시스의 모습에서 관객은 그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내가 정하는 내 이름
자신만의 욕망을 되찾음으로써 자아를 확립한 프란시스의 성장은 영화 내내 바라던 집을 얻는 결말로 형상화된다. 아파트 우편함에 넣을 메모지에 이름을 적으려던 그녀는, 칸이 작아 본명인 ‘Frances Halladay’의 절반밖에 보이지 않자 망설임 없이 종이를 접어버린다. 옆 칸처럼 더 작은 글씨로 다시 쓰거나, 두 줄로 나누어 적을 수도 있었지만, 프란시스는 종이를 접어 ‘Frances Ha’가 되기를 택한다.
©IFC Films
이 선택은 프란시스의 결말이 퇴보나 타협이 아닌, 성장과 자립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성장 서사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립에 도달한 그녀의 여정을 두고 제기되는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타협한 결말이 아니냐’는 의문에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지만, 대개 본인이 선택하기보다 타인에 의해 부여된다.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깨달은 프란시스는 더 이상 외부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다. Frances Ha가 되든, Frances Halladay가 되든, 타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규정하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외부의 압박에 굴복해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의 욕망에 기반해 본인만의 시선을 쟁취하고, 정체성을 결정할 주체로 거듭났다는 해석이 더욱 영화의 연출 의도와 맞닿아 있다.
영화 초반, 프란시스가 흥미롭다며 소피에게 읽어주는 라이어널 트릴링의 저서 ‘성실과 진정(Sincerity and Authenticity)’ 역시 이러한 관점에 힘을 싣는다. 트릴링은 흔히 ‘진정성’으로 번역되는 두 단어, Sincerity와 Authenticity를 구분하고, 이를 각각 ‘성실성’과 ‘진정성’으로 설명한다. 성실성이란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외부에 드러낼 때 거짓 없이 정직한 태도를 의미하지만,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외부의 영향을 피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닌다. 즉, 내면과 외면이 일치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라면 반드시 진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진정성이란 자기소외와 성찰을 거쳐,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욕망과 존재를 추구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는 프란시스가 왜 ‘유명한 무용수’가 되는 대신, 지금의 결말을 통해 성취를 이루어야 했는지를 납득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신의 꿈이 실은 사회적 효용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인정하고, 타인의 기대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길을 선택하는 프란시스. 성실성에서 진정성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변화는, 현실과의 타협보다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삶을 재정립한 결말에 가깝다.
내면과 외면이 일치해도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려
형성된 것이라면
반드시 진실하다고
볼 수는 없다.
ⓒGreta Gerwig
ⓒNoah Baumbach
영화의 공동 각본가인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은 자신들 역시 프란시스와 같은 충돌을 겪었으며, 작업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마치 자기 안에 있던 누군가를 꺼내는 기분이 들었다고 밝혔다. 과거의 자신과 닮은 고민을 품고 있을 관객에게, 그들은 마치 스물일곱 프란시스의 시선을 빌려 묻는 듯하다. 오늘 당신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은 정말 당신이 맞냐고. 자신이 되고자 쓰이는 시간이 어떻게 낭비일 수 있겠냐고.
오늘 당신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은 정말 당신이 맞는가?자신이 되고자 쓰이는 시간이 어떻게 낭비일 수 있겠는가.
©IFC Films
영화는 데이비드 보위의 ‘Modern love’를 영화 초반부와 엔딩 크레딧, 두 차례에 걸쳐 사운드트랙으로 삽입한다. 첫 번째가 레오스 카락스의 ‘나쁜 피’를 향한 오마주이자 헌사였다면, 두 번째는 또 다른 달리기를 준비해야 할 프란시스와 관객에게 바치는 격려가 된다. 전주의 드럼 소리처럼 힘차게 뛰는 심장을 지닌,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고자 우에서 좌로 달려 나갈 청년들에게 보내는 응원가인 셈이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그 응원가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원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과연 복사본으로 죽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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