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세상의 기획자들

초록이 이끄는 흐름대로 살아가기 

정원에서 배운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선요
2025.10.31
선요작가

일상을 조용히 관찰하며,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들을 공유하는 직장인이자 작가. 2019년 겨울 창가에 들인 화분 하나에서 시작해 네 평 베란다를 자신만의 정원으로 만들어왔다. 식물과 요리에 진심이라 그에 관해 계속 읽고 쓴다. 매달 뉴스레터 ‘네 평 정원에서 쓰는 일기’를 발행 중이며, 책 〈선요의 일상 파스타〉, 〈내 작은 정원 이야기〉를 출간했다.

Editor’s Comment

우리는 무엇이든 물으면 곧장 대답해주고, 손쉽게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 ―‘나는 어떤 삶을 원하지?’ ‘무엇이 나다운 선택이지?’― 에는 그 어떤 프로그램도 대신 답해줄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과 마주할 때에만 진실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튤립의 에세이 시리즈 〈나라는 세상의 기획자들〉은 이 물음에 주체적으로 응답하며 자기 삶을 기획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며 길어 올린 질문과 선택 끝에 피어난 ‘자기다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의 여정이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작지만 단단한 좌표가 되어주길 바란다.

네 평 베란다에서 식물을 관찰하고 키우는 작가 선요의 에세이로 세 번째 문을 연다. 작은 화분 하나를 들이는 일에서 출발해 7년간 자신만의 정원을 가꿔온 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한다. 관찰과 기록의 힘이 자신을 서서히 바꾸어놓았다고.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그의 베란다 정원은 새로운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게 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불완전함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일상을 보다 세심하게 가꾸고 싶거나, 나만의 취향과 마음이 담긴 세계를 만들고 싶은 이라면 이 글이 또 다른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작가 선요의 작은 정원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작은 화분에서 시작된 세계

정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어떤 이에겐 땅을 일구는 순간일 수도, 씨앗을 심는 순간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엔 7년 전 아파트 베란다 한쪽에 작은 미니 콩고 화분을 올려놓은 날이었다. 미니 콩고는 퇴근길에 들른 마트 꽃집에서 우연히 만났다. 퍼석한 내 얼굴과 달리,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미니 콩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저렇게 빛날 수 있을까?

그날 홀린 듯 미니 콩고를 데려왔다. 출근 전 물을 주고 나가면, 저녁에 돌아왔을 때 아침보다 조금 더 자란 잎들이 날 맞아주었다. 그 잎을 쓰다듬는 순간 하루의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단순한 기쁨이 정원의 시작이었다. 미니 콩고 이후로 여러 식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긴잎아카시아, 그다음은 크리핑 로즈메리… 식물이 하나둘 늘어나며 비어 있던 공간을 채워갔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네 평 남짓한 베란다를 정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가엔 크리핑 로즈메리, 올리브, 등나무가 있고 그 옆엔 햇살을 좋아하는 각종 식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그 반대편엔 수국, 고사리, 베고니아가 자리를 잡았다. 이 식물들에겐 적당한 햇살과 약간의 그늘이 필요하기에 베란다 안쪽을 차지하고 있다. 베란다 한쪽으로는 선반이 놓인 벽 옆에 높이 자라는 물푸레나무가 있고, 선반엔 백화등을 비롯한 작은 식물들이 층층이 올려져 있다. 크기와 높낮이가 다른 초록들이 빛을 받으며 만들어내는 풍경이 베란다를 하나의 작은 숲처럼 보이게 한다.

정원을 가꾸며 내게도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위로를 받는다는 느낌이 좋았다. 미니 콩고의 반질반질한 잎을 보고 있으면 내 울퉁불퉁한 마음도 곱게 정돈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위로받는 걸 넘어 내 삶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남향인 나의 베란다 정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온화한 햇살이 머물고, 저녁엔 반대편 베란다로부터 깊이 드는 노을빛이 잠시 스쳐 간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이 오기 전에 진다는 건 당연한 진리지만, 정원사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해를 탐구한다. 나 또한 베란다 정원을 가꾸며 계절과 시간에 따라 들어오는 빛의 형태와 색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빛뿐만 아니라 바람의 온도와 잎의 색 같은 미세한 변화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렇듯 관찰하는 매일이 모여 한 계절을 건넜고, 계절이 겹겹이 쌓이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아마 정원을 가꾸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며 정원은 점차 견고해졌다. 내 삶도 더 이상 평면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납작했던 캐릭터가 화면을 뚫고 나온 듯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처럼, 작은 화분에서 시작한 정원은 어느새 내 삶을 입체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식물에게서 배우는 삶의 리듬

삶이 입체적으로 변하면서 단순한 돌봄은 점차 내 안으로 향하는 물음이 되었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무엇이 나다운 선택인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앞에서 다시금 베란다 정원의 식물을 바라본다. 나는 매년 겨울에 한련화를 파종하는데, 이 덩굴성 한해살이풀은 자아가 뚜렷하다. 기댈 곳이 없으면 옆으로 눕는다. 덩굴처럼 자라지만 얌전히 감기지는 않는다. 그 대신 제멋대로, 흘러가듯 뻗어 나간다.

처음엔 조금 산만해 보여 화분을 빙 둘러 지지대를 세웠지만, 지금은 그 모습조차 이 식물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있는 힘을 다해 어딘가에 붙들리기보다는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내 방식대로 가겠다는 몸짓이랄까. 한련화를 보고 깨달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늘 어딘가 기댈 곳을 찾고 있었다는걸. 기댈 곳이 없으면 그냥 누우면 되는 거였다. 꼭 위로 반듯하게 뻗어 나갈 이유가 없었다. 흘러가듯 뻗어 나가도 어딘가로 나아가는 거니까.

그래,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하니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련화처럼 살아보자’는 파종을 할 때마다 늘 되뇌는 주문이 되었다. 식물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식물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단서를 던져줄 뿐이다.

겨울에 파종한 한련화는 늦봄에 꽃을 피우지만 간혹 한 달 늦게, 초여름에 꽃을 피울 때가 있다. 올봄의 한련화가 그랬다. 예년처럼 꽃이 피지 않아 초조했던 봄을 지나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드디어 한련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자 나는 그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올해의 한련화는 그저 시간이 더 필요했을 뿐이다. 한련화는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계절을 건너 자기 빛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정원과 함께한 시간은 나를 기다림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베란다의 작은 정원은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봄에는 연둣빛 고사리 싹이 올라와 새로움을 알렸고, 여름에는 물푸레나무의 녹음이 우거져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가을에는 서서히 빛이 옅어지며 백화등 이파리가 붉게 물들었고, 겨울에는 다음 계절을 위한 수국 가지들이 고요히 남아 있었다. 여름의 무성함과 가을의 수확, 겨울의 고요함과 봄의 새싹이 차례로 이어지는 삶을 따라가다 보면, 나 역시 어느새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원은 그렇게 내 시선을 바꾸었다. 빨리 앞서가야 한다는 마음 대신 계절이 이끄는 흐름에 몸을 맡기게 했다.

정원을 관찰하다 보면 같은 계절 안에서도 식물 각자의 리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계절 안에서도 높낮이가 모두 다르고, 때론 멈추기도 하기에 더욱 조화롭다. 봄의 수선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꽃잎의 색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동시에 등나무는 굵은 마디마다 초록빛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고사리는 아침에 머리를 말고 있다가도 오후가 되면 갑자기 쭉 뻗어 고개를 든다. 그 불규칙한 리듬이 모여 오히려 더 조화로운 풍경을 만든다.

나는 이제 어떤 계획을 세울 때도 정원의 리듬을 먼저 떠올린다. 빠르게 성취하는 것보다 제때 도착하는 것, 완벽하게 해내는 것보다 꾸준히 이어가는 것. 작은 방과 작은 정원, 그리고 매일의 작은 기록이 모여 내 삶의 리듬을 새롭게 짜주었다. 식물들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때론 잠시 멈추어도 된다고 말이다.

식물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단서를 던져줄 뿐.

정원이 알려준 실패의 진짜 의미

정원을 돌보는 일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하다. 식물은 늘 내가 세운 계획과는 다르게 자랐다. 태풍에 꺾여버린 토마토 가지, 한파에 얼어붙은 튤립 구근, 장마철 습기에 곰팡이로 뒤덮인 작약… 계절이 바뀔 때마다 뜻밖의 변수가 찾아왔다.

어느 해의 한여름, 수국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시들어버린 적이 있다. 아침에 베란다에 나가보니 잎들이 눅눅한 여름 공기를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과습이 아닐까? 흙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은 흙은 수분을 적당히 머금고 있었다.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정원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20일. 수국이 모두 시들었다. 물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너무 많이 준 걸까. 화분이 좁아서 뿌리가 답답한 걸까. 원인을 알 수가 없다.”

며칠 동안 수국을 살리기 위해 분갈이를 고민하기도 하고 물도 조절해 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계절이 답을 내려줄 거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가을이 오자, 시든 줄기 사이로 다시 초록빛 잎이 돋았다. 수국에게 한여름은 단지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알았다. 식물마다 번성하는 계절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정원의 모든 실패에는 내가 알 수 없는 계절의 법칙이 숨어 있었다.

실패의 기록은 더 있었다. 봄에는 물을 아껴 크로커스를 몽땅 말려버렸고, 가을에는 과한 물로 가는잎아카시아의 뿌리를 썩게 했다. 노랗게 변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릴 때의 허망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도 어김없이 정원일기를 펼치고 썼다.

“9월 10일. 가는잎아카시아 가지를 툭 치니 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분갈이를 하기로 했다. 뿌리를 보니 잔뿌리들이 몽땅 썩어 있었다.”

약간 썩은 듯 퀴퀴한 냄새가 났고, 손끝에 묻어난 검은 흙은 더 이상 생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화분에 있던 흙을 모두 털어내 보송한 흙으로 교체하고 썩은 뿌리는 잘라내어 다시 심었다. 한 달 후 가는잎아카시아는 새순을 내기 시작했다. 순간의 좌절감은 컸지만, 그 실패들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무너진 자리에 뿌리를 다시 심어보고, 물 주는 방법을 바꾸고, 흙을 갈아보며 조금씩 배우는 힘. 실패는 멈춤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정원에서 실패와 미완성은 이어져 있다. 시들어 가는 고사리 옆에선 또 다른 고사리 새싹이 올라왔다.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에서 다시 시작하는 풍경. 나는 그 속에서 미완성의 의미를 배워갔다. 정원의 본모습은 완벽함이 아니라, 언제나 미완성인 순간에 있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달려가는 곳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가능성을 가진 무한한 세계. 그런 정원을 가꾸며 삶 역시 완벽한 답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을 이어가면 된다는 사실도. 작은 네 평 정원은 어느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정원일기에 자주 ‘다시’라는 단어를 쓴다. 다시 심고, 다시 물을 주고, 다시 기다리는 일. 봄에 실패한 식물은 가을에 다시 시도할 수 있었고, 가을에 놓친 씨앗은 겨울을 건너 이듬해 봄에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시’는 좌절의 반복이 아닌, 미완성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하는 정원의 언어다. 수국이 다시 잎을 틔워내듯 나는 지금도 정원 속 실패의 흔적 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간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계절을 건너며 흔들리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그 순환 속에서, 나는 나만의 풍경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원이 그러하듯이.logo icon

나를 채운 조각들 | 정원가의 열두 달, 피트 아우돌프, 오만과 편견

정원가의 열두 달 내게 정원과 삶의 본질을 일깨워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책이다. 그는 정원 일을 근사하게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원에서 겪는 허무하고 소소한 실패와 ‘정원사는 늘 무언가를 놓치는 동시에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통찰을 재치 있게 적어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정원 가꾸기가 완벽한 조경의 기술이 아니라 끝내 완성되지 않는 재미라는 것을 배웠다. 병충해에 시달리고, 갑작스러운 비바람에 쓰러지고, 한순간의 부주의로 새순을 밟아버리는 일. 이런 실수들이 모여 정원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차페크의 태도는 큰 위안이었다. 정원일기에 실패의 순간을 적어놓을 때마다 나는 차페크의 문장을 떠올린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오히려 불완전함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진짜 재미가 있다는 것. 정원은 늘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가득 차고, 그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피트 아우돌프 네덜란드 출신의 정원사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는 정형화된 정원의 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의 정원을 보여주었다. 그는 화려한 꽃 중심의 정통적인 정원과는 달리 다년생 식물과 풀, 그리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식물의 구조와 질감을 중심에 두었다. “겨울에 아름다운 정원이 사계절 아름답다”는 아우돌프의 말이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울인데,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그가 조성한 정원 사진을 보고 나서야 납득했다. 갈색과 붉은빛이 감도는 겨울의 그라스들이 하늘과 함께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시든 꽃을 잘라내기보다 남겨두는 것을 택했다. 죽음조차 정원의 일부가 되어 사계절 내내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의 철학에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정원은 반드시 화려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사실. 지금은 삶이 초라해 보이는 시기라 해도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오만과 편견 내게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친 작품은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Elizabeth Bennet)의 러브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보여준 확고한 자기 기준 때문이다. 세상이 ‘좋은 혼처’라고 말하든 주변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든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시대의 상식과 규범을 넘어서는 그녀의 결단은 내가 삶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때마다 떠올리는 중요한 장면이다. 정원에서 가지치기를 하는 것처럼, 어디를 남기고 어디를 잘라낼 것인가. 누군가 대신 결정해줄 수 없는 선택 앞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내린 판단의 무게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선택은 나다운가?

Editor. 박혜강 
#나라는세상의기획자들#선요#식물#반려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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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요

직장인·작가

저서 〈선요의 일상 파스타〉(2024), 〈내 작은 정원 이야기〉(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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