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나는 철 지난 떡볶이 코트에 잔스포츠 가방을 메고 있다. 사선으로 꽂은 머리핀도 보인다. 롱샴 메신저백과 노스페이스 패딩이 유행했을 무렵, 그것은 퍽 뜬금없는 옷차림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동급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핀 뭐야? 안 어울려.” 궁지에 몰린 기분. 수치심이 울컥 올라왔지만 핀을 빼지 않기로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을 눈치챘던 것일까? 그렇게 8교시 내내 핀은 깃발처럼 꽂혀 있었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뜻밖의 아드레날린이 온몸에 퍼져왔다. 나는 더 내가 된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훗날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지켜내는 법부터 배웠다. 발끈 타오르는 오기가 얼결에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도. 그때부터 나는 나와 편먹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내 말에 더 귀 기울이며 사는 일이 짜릿했기 때문이다. 자유롭다는 기분도 들었다. 자유란 두려움에 저항하는 상태,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나의 선택을 지지하는 태도였다.
대학생은 내 선택을 이리저리 실험하기 적절한 시기였다. 옷, 책, 애인, 하다못해 점심으로 먹을 메뉴까지 나의 조각이라고 믿는 스물은 깜찍한 동시에 얼마나 섬뜩했는지. 2학년이 되자 더 과감한 선택을 감행하고 싶어졌다. 사는 곳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나는 유럽으로 떠났다. 엄마의 반대를 무릅쓰는 일로 이 결정의 진정성 또한 이미 증명된 터였다. 돌아온 즉시 알바비를 모아 다시 비행기를 탔다. 오기 반, 체질 반. 그때부터 내 인생은 본격적인 삼천포로 빠졌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서른셋의 여름. 집 정리를 하던 중, 우연히 아끼는 편지를 꺼내 읽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위치를 묻고 있었다. “지금은 어디야? 네가 뉴욕에 있을지, 서울에 있을지 몰라서 웃음이 났어.” 회상에 젖은 나는 잠시 미소 지었다. 여행을 떠나면 공항의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서 단잠을 잤고 쾌쾌한 향신료 냄새도 잘 견뎠으며 무례한 행인을 만나도 금세 기분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때 내게 있던 건 용기가 아니라 명랑함일 뿐이었단 생각을 지금에서야 한다.
여행이라는 강력한 매뉴얼에 따라 사는 인생은 꽤 홀가분했다. 낙관이 여정 전체를 덮었으니까. 길을 잃어도, 소통이 매끄럽지 못해도 창피하지 않았다. 나에게 관대할 수 있었다. 일상의 고민과 불평이 잦아들고, 도취와 활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걔 아직도 여행해?”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애인이 칭찬받을 때 쓰던 표현을 떠올렸다. 애인은 그가 잘한 일들을 모두 ‘사고’였을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겸손한 표현을 따르자면, 여행은 내 의지와는 다소 무관한 운명 같은 거였다.
물론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발생해야 사고다. 여행이 주입한 내 습관적인 낙관을 비웃듯, 나는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야 진짜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것은 내가 강제성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안개처럼 몰려드는 고민을 마주하며 하루가 시작된다. 커피를 내려 마시거나 외출할 때, 혼자 갈 카페를 고를 때 초조하고 멍해진다. 작은 결정들에 끙끙 앓는다. 내 안은 꽉 막혔고, 공감을 구하기 민망할 정도로 길을 잃었다. 최상의 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진한 탓일까? 타지에서 인생을 다 쓰고 돌아와서? 모든 것에 감탄하는 인간과 돌처럼 굳어버린 인간. 이 낙차는 내 기질이 되어버렸다. 남은 건 재봉될 수 없는 자투리 조각들뿐. 여행이 만찬이라면 돌아온 일상은 설거지다.
이런 모순이 나를 집어삼킬 때면 애써 정류장으로 나가본다. 버스는 굳어버린 내게도 마음에 들일 장면 몇 개를 허락하는 너그러운 친구니까. 드물게 아무 버스나 타버리는 용기를 내는 날이 있다. 버스에 탄 나는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세상을 바라본다. 단지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햇살과 아이들과 나무를 만끽할 수 있는 이 즐거운 수동성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낀다. 횡단보도에 버스가 정차한 순간, 근래 친구와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었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고 싶어. 이동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뭔가를 하는 기분이잖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창문 밖 풍경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 재밌어.” 친구가 말했다. “이제 떠나야만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믿던 시기는 지난 것 같아.” 이번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떠나는 건 그 자체로 좋아.” 아아, 지금 이 의자가 기차의 침대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박해 있는 일상을 견딜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다른 요소를 찾으면 될 것이다. 무엇이 나를 옮겨놓을 수 있을까? 집에서 저릿한 만족감을 느꼈던 때가 언제였지? 후유증이 이만큼 심해지기 전, 아득한 과거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 속의 나는 버스나 열차의 객실 칸에서처럼 갇혀 있다. 격자무늬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이 보인다. 달리는 열차만큼 상쾌했던 그곳은 코로나로 격리 중이었던 4평 남짓한 내 방 안이다. 런던에서 록다운 4일 전 아슬아슬하게 귀국한 후 엄마가 아늑하게 꾸며둔 내 방으로 들어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충동을 먹고 사는 내게 록다운이라는 상황은 새로운 미션에 가까웠다. 이기적이게도, 예상에서 어긋난 것이라면 제아무리 재난이라 해도 내게 도움이 될 여지를 찾았고, 그 안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지인이 책 선물을 보내왔다. 그 책은 179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내 방 여행하는 법〉으로, 격리 생활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릴 책은 없었다. 저자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는 불법 결투를 들킨 벌로 42일간 칩거령을 선고받는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방 안 가구들의 구조와 충실한 반려견, 그리운 친구, 화가 라파엘로의 초상화에 대해 쓴다. 방 한 칸은 삶 전체에 대한 비유이기에 그의 글은 결국 인생의 은밀한 곳으로 파고든다. 다시 말해, 내 방 여행하기란 ‘나’ 여행하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떠올려보면 그때 나는 그 책을 다 읽지도 않았다. 내용을 실천하느라 분주했기 때문이다. 방치해둔 지난날의 단상들을 책상 위에 쏟아냈다. 미뤄놓았던 박음질을 시작했다. 메스트르처럼, 나는 그 2주 동안 엄청나게 많은 글을 썼다. 여행이라는 추상은 집이라는 종착지에 닿았을 때에야 비로소 실체를 얻는 듯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출간된 내 책 〈쉬운 천국〉의 서문도 이때 나왔다. 그 글에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스스로도 깜짝 놀랄 고백을 했던 순간이 등장한다.
“나 사실… 여행 싫어해.”
나는 낯선 세상의 구석구석을 떠도는 여행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매번 같은 곳을 재방문했다. 내가 갈구했던 것은 매번 다름을 발견할 수 있는 성실하고 사려 깊은 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새롭고 도전적이어야 한다는 여행자의 전형성을 따르는 대신, 삶을 파고드는 방식으로서의 여행을 발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넓어지는 게 아니라 더 깊어지고 싶어.’ 고등학생 때처럼, 다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쓰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아주 깊은 곳에 있던 진짜 내 마음과 마주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을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쓰기는 나조차 알 수 없는 미지로 나를 끌고 갔다.
그때의 벼락같은 깨달음과 해방감은 어디로 갔을까. 어느 순간 나는 또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혹시 쓰지 못해서는 아닐까? 지난 1년간 연재 중인 월간지의 2,500자 남짓한 칼럼을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못했다. 글이 나의 삶을 재촉하고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의 후유증이 아닌, 작가로서의 후유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내 경험을 집요하게 꿰뚫어 본 다음 엄청난 동력을 기울여 언어화하는 대신 그저 흘려보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즐기는 것이 진정한 삶과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런 내 양가감정은 한때 적어두었던 인스타그램 프로필 문구에서도 드러난다.
Writer but mostly wanderer.
작가지만 대체로 방랑자.
슬쩍 발을 빼는 것 같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써야만 나다워지는 그 고단한 길을 회피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으니까. 이렇게 흔들리면서도 글이라는 걸 계속 쓸 수 있을까? 자꾸만 불신이 피어올랐다. 그냥 겪는 것만으로는 쓰는 이의 숙제가 완성되지 않는다. 글이라는 바늘로 내면을 꿰매는 일이 뒤따라야 한다. 나를 쥐어짜는 그 지리멸렬한 과정을 다 겪고 나면 이별이 온다. 글이 완성되면 작가는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이별한다. 그럴 때면 종이 위에서 칼춤을 추며 삶을 희생하는 기분도 든다. 잔인할 만큼 내 인생을 쥐어짜서 진실의 한 방울을 증류하는 일. 글이 막혔다는 것은 더는 ‘그만큼’ 진실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파업 상태다.
쓰지 않은 그 모든 삶은 어디로 가서 흩어질까? 걱정은 됐지만 그렇다고 글이 써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선 나를 마주할 수 있는 다른 활동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좁고, 조용하고, 형편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장소를 수소문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옵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익숙한 아스팔트 길을 걸어 그곳으로 갔다. 접수대에서 떨어지려는 눈물을 참고 원장님과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에요. 이번엔 얼마나 다녀오셨어요?”라는 그의 말은 “얼마나 헤매다 오셨어요?”로 들렸다. 내가 찾은 곳은 단골 요가원이다. 곧 차분한 명상과 함께 70분의 빈야사 수련이 시작됐다.
요가는 꼭 종이접기 같다. 참을성 있게 순서를 따라가면 나중엔 장미도 되고 비행기도 된다. 어떤 것이 될지 아직 모르는 채, 단순한 호흡 정리로 시작되는 것이 인생과 비슷해 보인다. 동작은 점점 깊어져갔다. 나는 고무로 된 매트에 차분히 뺨을 갖다 댔다. 오랜만에 불안이 아니라 납작한 발바닥이 나를 휘청이게 했다. 내 굳은 영혼은 물렁물렁 풀어졌다. 땀과 함께 감정도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수술 뒤에 방귀를 뀌어야 퇴원이 가능한 것처럼 이제야 소화된 감정들이 표정으로 터져 나왔다. 킬킬거리다가 울기도 했다.
요가는 나를 두려움과 맞서게 했다. 매트 위에서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혼란한 마음과 자신만만한 마음이 등을 맞대고 서로를 밀쳐냈다. 그 안에서 나의 휘청임은 되려 감당하기 힘든 많은 감정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요가를 할 때 나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쉬고 있을 때조차. 선생님은 아기 자세로 쉬는 회원을 흐뭇하게 내려보며 말했다. “요가에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어요.” 그렇다면 요가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의 비무장지대. 이 말을 실제로 믿기까지는 시간이 왕왕 걸린다.
동작이 모두 끝나고 털썩 누운 나는 글쓰기를 생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나는 한 번에 깊은 곳에 도달하려는 부담 때문에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는다면 잘함과 못함의 시기를 모두 품고 평생에 걸쳐 만들어질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요가처럼, 글은 완성될 수 없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만 다음이 있을 뿐이다.
수업이 끝난 밤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장을 꺼내 주제도 결론도 교훈도 없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독자마저 혼란에 빠뜨릴 어지러운 글들, 지금 당장 확실한 답을 내어주지 않는 글들. 글의 성질은 땀이 송송 맺힌 내 몸뚱이처럼 변했다. 보다 느리고 유연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럽지만 언젠가의 깊음을 약속하는 말들로 나아갔다.
확신 없이 흔들릴 때면 경전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학자 전영애는 한 강연에서 성장하는 인간에 대해 말했다. “인간은 의식하든 안 하든 마음에 솟구치는 것이 있고, 그러므로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것이지요.” 어쩌면 인생 전체는 작가 수업의 일부일지 모른다. 끝없는 자기 의심과 방황은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어주었으니까.
아직도 나는 연습 중이다. 내 안의 혼돈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을. 그리고 생각한다. 작가와 방랑자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얽힌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나에게는 이 두 가지 얼굴이 전부 필요하다. 쓰는 것 말고는 한없이 부유하는 내 마음과 화해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무엇에도 유능하지 않은 채로도 계속 걸어가라고, 글이 내게 말한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다시 글쓰기로 돌아온다. 최상의 나는 다 써버렸을지 모르지만 최선의 나는 남아 있다는 믿음으로. 방황만큼은 언제까지나 내 편일 거라는 마음으로. 사실은 그것이 나의 가장 정직한 재료일 거라는 확신으로.
나를 채운 조각들 | 소피아 코폴라, 아빠
소피아 코폴라 고등학생 시절에 봤던 영화들을 아직도 제일 좋아한다. 그때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를 만난 것이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분,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포착해낸다. 인물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하지만, 그 심리란 어디가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가 없는 미묘한 형상으로 다가온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나.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정확한 것이다. 그녀의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속단하지 않는 법을 내게 가르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천천히 관계를 맺는다. 쉽게 풀리고 마는 매듭이라 할지언정 진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썸웨어〉를 제일 좋아한다.
아빠 여행이 학교 수업보다 우선시되는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덕분이다. 그는 멋이 있는 사람이었다. 멋의 정의는 세련되거나 아름다움도 뜻하지만 그의 경우 운치 있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언젠가 나는 “여행은 마음의 창문을 만드는 일”이라는 문장을 쓴 적이 있는데, 아버지에게서 영감을 얻은 이미지였다. 안개나 폭우 등 꺼려지는 날씨도 아빠는 운치 있다며 퉁쳤다. 여행이라는 건 강력한 매뉴얼이자 테마이기 때문이니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는 여행하지 않는 인생이 죽은 인생이라고 가르쳤다. 수시로 움직이고 덤벼들라는 뜻이었다.